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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브리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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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주의 아프리카 소사 2014.10.31 18:04

1994년 7월 22일, 감비아에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다우다 자와라 대통령이 실각하다.

1994년 7월 22일, 감비아에서 무혈 쿠데타가 일어나 다우다 자와라 대통령이 실각하고 야야 자메가 대통령으로 등극하다.


 아프리카 대륙의 정치적 불안정의 원인으로 꼽히는 요소 중 하나는 식민지 시대에 획정된 국경이다. 대다수 아프리카 국가들은 여러 국가와 이웃하고 있을 뿐 아니라(탄자니아와 잠비아의 경우, 무려 8개국과 접경하고 있다), 완전한 내륙국가의 수도 그 어느 대륙보다 많다. 식민지 시대의 국경은 종족적 분절과 같은 요소를 거의 고려하지 않은, 순전히 기하학적인 분할에서 비롯할 떄가 많다. 그 대표적인 예로, 기네 북부에서 발원하여 세네갈을 거쳐 대서양으로 향하는 감비아 강을 따라서 길게 걸쳐 있는 감비아를 들 수 있다. 국토의 길이가 500킬로미터에 달하지만 폭은 20킬로미터가 못 되는 구간도 종종 있는 감비아는 이 국가를 감싸고 있는 세네갈과 달리 영국의 식민지였다. 영국은 1816년 항노예무역 등에 이용하기 위하여 대서양으로 나가는 감비아 강의 하구에 포구를 개발하고 당시 영국 식민성 장관이었던 헨리 배서스트 백작의 이름을 따 배서스트라 이름 붙였다. 감비아 강은 서아프리카 전체로 볼 때 가장 항행하기 편한 하천이었기에 19세기 동안 프랑스와 영국의 끝없는 분쟁을 촉발했는데, 프랑스가 철도를 통해 교역을 니제르 강 등으로 옮겨가자 영국은 몇차례에 걸쳐 프랑스에게 감비아 보호령을 프랑스의 다른 보호령과 교환하자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1947년부터 영국은 다른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감비아에게 독립을 부여하기로 결정하고 의회 선거를 실시해왔다. 1960년 총선에서 다수당이 된 것은 민중진보당(PPP, People's Progressive Party)과 그 지도자였던 다우다 자와라였다. 감비아 중부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공부한 수의사였던 자와라는 배서스트 등 도시 엘리트들에 의해 독점되다시피 했던 감비아 보호령의 정계가 변화함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그러나 부족의 추장들이 의회 의원 중 8명을 선출하게 되어있던 당시 선거 구조로 인하여 자와라는 보호령의 총리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어 1962년 선거에서 다시 PPP의 승리를 이끌어낸 자와라는 이번에는 총리직을 차지했고 이어 1965년 독립된 감비아의 초대 총리가 되었다. 이후 그는 1970년에 국민투표를 통해서 감비아를 공화국으로 만들고 대통령에 취임했다.



 자와라의 재임기간 동안 감비아는 상대적인 정치적 안정을 누렸지만 낮은 경제성장률과 부패, 그리고 농업에 생산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빈곤국가의 상태를 탈출하지 못했다. 자와라는 당대 아프리카의 지도자들의 그것과는 달리 형식적 민주주의에 비교적 충실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데, 건국 이후 줄곧 다당제를 유지했다는 것이 그 증거 중 하나다. 그러나 이러한 통치 방식은 감비아의 부패와 저성장을 바꾸어놓는데 큰 역할을 하지 못했고 그에 대한 정치적 불만은 점증하고 있었다.

 1981년 자와라가 영국의 찰스 황태자의 결혼식에 참석 중인 것을 틈타 쿠코이 산양을 중심으로 하는 감비아 내의 반 자와라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자와라는 급히 세네갈로 향했고 며칠 뒤 세네갈 군은 반줄(1970년 변경된 배서스트의 새 이름)을 침공하고 자와라를 대통령 직에 복귀시켰다. 몇달 뒤, 자와라와 세네갈 대통령 압두 디우프는 기자회견을 열고 세네감비아 연방의 발족을 선언했다. 1960년대부터 세네갈과 감비아 사이의 통일 가능성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지만, 이러한 통합은 자와라 대통령의 허약한 국내 정치적 기반을 보완하려는 의도와 감비아의 정치적 불안정이 세네갈로 전염될 수 있음을 우려한 세네갈 측의 이해관계가 만난 결과였다. 세네감비아 연방은 1989년, 감비아가 연방 이상의 통합을 거부하면서 해체되었다.

 1994년 7월 22일, 만 29세의 장교였던 야히야 자메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자와라는 거의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세네갈로 다시 망명했다. 자메는 헌법의 기능을 정지하고 5인으로 구성된 임시 군사평의회를 통해 감비아를 철권통치하기 시작했다. 1996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자메는 선거의 공정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국내외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무난하게 당선되었고 이후 지금까지 감비아의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있다. 자메의 통치는 감비아 내외에서 그 억압적인 성격으로 인해 비난받고 있다. 2011년 서아프리카 경제협력기구(ECOWAS)는 감비아의 선거에 감시단을 보내는 것을 거부하면서, 감비아의 대선이 "투명하지도 공정하지도 않다"고 일갈했다. 앰네스티 인터내셔널 등의 국제인권단체들은 감비아에서 정치적 반대자들이 탈법적인 방식으로 체포, 구금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자메 스스로도 변덕스럽고 이해하기 어려운 언행을 이어가고 있는데, 자신이 에이즈를 고치는 치료법을 개발했다고 선언하거나 영연방을 "신식민주의적 기구"라 비난하며 탈퇴한 것이 그 예들 중 하나다. 후자의 경우 자메가 인권유린을 자행하고 있다는 국제사회의 비난에 대한 대응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참조


존 리더, 『아프리카 대륙의 일대기』(남경태 역), 휴머니스트, 2013.

Marco Evers. (Mar 08, 2007). The Quack in Gambia: African Despot 'Cures' AIDSSpiegel.

Bubacarr Sowe. (Aug 2, 2012). Yahya Jammeh: 18 Years and CountingThinkAfrica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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